볼로가세스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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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볼로가세스 5세는 191년 파르티아의 왕이 되었으며, 아르메니아와 이베리아의 왕위를 자신의 아들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는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전쟁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수도 크테시폰이 점령당하기도 했다. 208년 사망 이후 아들 볼로가세스 6세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다른 아들 아르타바누스 4세와의 내전이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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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로에스 1세는 파코루스 2세에게 반기를 들고 왕위를 찬탈하여 볼로가세스 3세와 경쟁하며 파르티아 서부 지역을 장악했으나, 로마의 침공과 볼로가세스 3세와의 권력 다툼 끝에 왕위를 잃고 사망한 파르티아의 왕이다. - 파르티아 샤한샤 - 오로데스 3세
볼로가세스 5세 | |
---|---|
기본 정보 | |
![]() | |
칭호 | 만왕의 왕 |
왕조 | 아르사케스 왕조 |
종교 | 조로아스터교 |
통치 | |
파르티아 왕 재위 | 191년 – 208년 |
파르티아 왕 이전 | 볼로가세스 4세 |
파르티아 왕 이후 | 볼로가세스 6세 |
아르메니아 왕 재위 | 180년 – 191년 |
아르메니아 왕 이전 | 소하에무스 |
아르메니아 왕 이후 | 호스로우 1세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볼로가세스 4세 |
자녀 | 레브 1세 볼로가세스 6세 아르타바누스 4세 호스로우 1세 |
생애 | |
사망 | 208년 |
2. 이름
볼로가세스(Vologases)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표기된 파르티아어 ''Walagaš''(𐭅𐭋𐭂𐭔|왈라가쉬xpr)의 형태이다. 이 이름은 페르시아어에서는 ''Balāsh'', 중세 페르시아어에서는 ''Wardākhsh''(또는 ''Walākhsh'')로 나타난다. 이름의 어원은 불분명하지만, 페르디난트 유스티는 이름의 첫 번째 형태인 ''Walagaš''가 "힘"(varəda)과 "잘생김"(gaš 또는 현대 페르시아어의 geš)이라는 단어의 합성어라고 제안한다.
볼로가세스 5세는 초기 생애 동안 아르메니아의 통치자였으며, 소하에무스의 뒤를 이었다. 1세기와 2세기 동안 아르메니아 왕위는 일반적으로 파르티아 왕중왕의 가까운 친척이 차지했으며, 그들은 "아르메니아 대왕"이라는 칭호를 가졌다. 5세기의 아르메니아 역사가 아가탄겔로스에 따르면, 아르메니아 왕은 파르티아 왕국에서 파르티아 왕 다음으로 두 번째 서열이었다. 그러나 현대 역사가 리 E. 패터슨은 아가탄겔로스가 자신의 고향의 중요성을 과장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3. 생애
189년, 그는 아들 레브 1세를 이베리아 왕위에 앉혔다. 191년 아버지 볼로가세스 4세가 사망하자 볼로가세스는 파르티아 왕위에 올랐고 아르메니아 왕좌는 아들 호스로브 1세에게 넘겨주었다. 그의 왕위 계승에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오스로에스 2세 (190년)는 볼로가세스 4세가 죽기 전부터 이미 메디아에서 자립했으나, 볼로가세스는 그를 빠르게 진압한 것으로 보인다.
볼로가세스는 오현제의 해 동안 로마 왕좌를 놓고 다툰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페스케니우스 니게르를 지지했다. 그는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로마 속국인 아디아베네와 오스로에네 문제에도 개입했고, 이 때문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195년에 파르티아 제국을 공격했다. 세베루스는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하여 오스로에네를 로마 속주로 만들고, 199년에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점령했다. 동시에 메디아와 파르스의 파르티아 속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스스로를 "파르티쿠스 막시무스"(Parthicus Maximus, "파르티아의 위대한 정복자")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식량 공급과 증원 부족으로 점령지를 유지할 수 없었고, 군대를 철수하는 동안 아랍 요새 하트라를 두 번이나 정복하려 했으나 실패한 뒤 군대를 시리아로 철수시켰다.
202년에 평화가 회복되었고, 아르메니아와 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로마의 지배가 재확인되었다. 이란학자 투라지 다리야에 따르면, "왕조는 명성의 많은 부분을 잃었고" "전환점"에 도달했다. 205/6년에 파르시스의 지방 통치자 파바그는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영주 고치히르를 전복하고 파르시스의 수도 이스타크르를 장악했다. 그의 아들 아르다시르 1세는 정복을 계속하여 파르티아 제국을 전복하고 224년에 사산 제국을 건국했다.
볼로가세스는 208년에 사망했고, 아들 볼로가세스 6세가 그 뒤를 이었다.
3. 1. 아르메니아 왕
볼로가세스 5세는 초기 생애 동안 아르메니아의 통치자가 되어 소하에무스의 뒤를 이었다. 1세기와 2세기 동안 아르메니아 왕위는 일반적으로 파르티아 왕중왕의 가까운 친척이 차지했으며, 그들은 "아르메니아 대왕"이라는 칭호를 가졌다. 5세기의 아르메니아 역사가 아가탄겔로스에 따르면, 아르메니아 왕은 파르티아 왕국에서 파르티아 왕 다음으로 두 번째 서열이었다. 그러나 현대 역사가 리 E. 패터슨은 아가탄겔로스가 자신의 고향의 중요성을 과장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르메니아를 통치했던 이전의 8명의 아르사케스 왕자들과 달리, 볼로가세스는 그의 후손들이 아르메니아 왕위를 차지하도록 보장할 수 있었으며, 그들은 사산 제국이 428년에 아르메니아 왕위를 폐지할 때까지 이 나라를 통치했다.
189년, 그는 또한 그의 아들 레브 1세 (어머니는 파르나바즈 왕조의 통치자 아마자스의 누이였다)를 이베리아 왕위에 앉혔다. 그의 후손들은 284년까지 이베리아를 통치했으며, 그 후 다른 파르티아 가문인 미흐란 왕가에 의해 대체되었다.
3. 2. 파르티아 왕
191년 아버지 볼로가세스 4세가 사망하자 볼로가세스는 파르티아 왕위에 올랐고 아르메니아 왕좌는 아들 호스로브 1세에게 넘겨주었다. 권력 이양이 평화롭게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내전으로 얼룩졌는지는 불확실하다. 그의 왕위 계승은 논쟁의 여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스로에스 2세 (190년)는 볼로가세스 4세가 죽기 전부터 이미 메디아에서 자립했으나, 볼로가세스는 그를 빠르게 진압한 것으로 보인다.
볼로가세스는 192~193년 오현제의 해 동안 로마 왕좌를 놓고 다툰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페스케니우스 니게르를 지지했다. 그는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로마 속국인 아디아베네와 오스로에네 문제에도 개입했다. 이 때문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195년에 파르티아 제국을 공격했다. 세베루스는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하여 오스로에네를 로마 속주로 만들고, 199년에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점령했다. 동시에 메디아와 파르스의 파르티아 속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스스로를 "파르티쿠스 막시무스"(Parthicus Maximus, "파르티아의 위대한 정복자")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식량 공급과 증원 부족으로 점령지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는 군대를 철수시켰고, 철수하는 동안 아랍 요새 하트라를 두 번이나 정복하려 했으나 실패한 뒤 군대를 시리아로 철수시켰다.
202년에 평화가 회복되었고, 아르메니아와 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로마의 지배가 재확인되었다. 이란학자 투라지 다리야에 따르면, "왕조는 명성의 많은 부분을 잃었고" "전환점"에 도달했다. 이제 파르시스 왕들은 약화된 아르사케스 종주국에 의존할 수 없었다. 205/6년에 파르시스의 지방 통치자 파바그는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영주 고치히르를 전복하고 파르시스의 수도 이스타크르를 장악했다. 그의 아들 아르다시르 1세는 정복을 계속하여 파르티아 제국을 전복하고 224년에 사산 제국을 건국했다.
볼로가세스는 208년에 사망했고, 아들 볼로가세스 6세가 그 뒤를 이었지만, 몇 년 후 또 다른 아들 아르타바누스 4세가 왕위를 찬탈하려 시도하여 내전이 발생했다.
3. 3. 로마와의 전쟁
193년경, 로마 황제 코모두스가 측실과 친위대 등에 의해 암살당하고, 페르티낙스가 새 로마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페르티낙스도 불과 3개월 만에 암살당하고, 로마에서는 여러 명의 황제가 난립하여 심각한 내란이 발생했다. 볼로가세스 5세는 난립한 로마 황제 중 한 명인 니게르를 지지하고, 로마령 시리아와 아나톨리아 동부에 침입했다.
로마 내란에서는 판노니아 속주 총독이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포에니계 인물이며, 그의 가족은 페니키아어밖에 사용하지 못했다고 한다)가 로마 시에 무혈 입성하여, 다른 황제에 비해 우위를 점했다. 세베루스는 니게르에 대항하여 아나톨리아로 향했고, 파르티아군은 니시비스(현 터키령 니사이빈)에서 이에 맞섰지만 패배하여 철수했다.
196년, 갈리아에서의 반란 진압을 위해 세베루스가 서쪽으로 향하자, 볼로가세스 5세는 반격에 나섰지만, 종속 왕국 중 하나인 아디아베네 왕국의 왕 나르세스의 반란이 발생했기 때문에 이를 공격하여 나르세스를 살해했다. 197년에는 세베루스가 다시 전선으로 돌아와 파르티아 영내에 침입해 왔다. 볼로가세스 5세는 병력을 모아 크테시폰까지 철수했지만, 열세에 몰려 더욱 퇴각했기 때문에 198년에는 크테시폰이 로마에 점령되었다.
그러나 보급 부대를 공격하여 로마군을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고, 전쟁은 종결되었다.
3. 4. 페르시스의 반란과 사산 제국의 기원
208년경 파르티아 제국의 종속 왕국 중 하나이자 최대 규모였던 페르시스 왕국에서 파르파크가 왕위에 오르며 반란을 일으켰다. 볼로가세스 5세는 이 반란을 진압했지만, 파르파크를 폐위시키지는 못했고, 페르시스는 다시 파르티아의 종주권 아래 놓였다. 그러나 이 해는 훗날 사산 왕조의 기원년으로 여겨지게 된다.
208년에 볼로가세스 5세가 사망한 후, 그의 두 아들 볼로가세스 6세와 아르타바누스 4세는 왕위 계승을 놓고 격렬하게 다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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